책이 모든 정답을 주지 못한다

책이  모든 정답을 주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자기 계발서 열풍이 출판계를 흔들고 있다. 서점의 주 매대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하는 게 현실이다. 그 열풍의 이면에는  삶의 척박한 현실을 벗어나서 자기 계발서 저자 같은 달콤한 성공을 보장할 것 같은 기대를 하게 만들고, 남들 다 읽는데 나만 읽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은 생각을 가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책 내용은 대부분이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하고, 자극적인 제목으로 독자들을 유인하고 있다. 제시되는 해결책이란 게 몇 가지 공식과 원리를 제시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자기 계발서의 내용처럼 그렇게 단순화시킬 만큼 명료하지 않고, 문제의 해결책도 공식이나 원리로 매뉴얼화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다양하다. 삶의 문제들을 헤쳐 나아가야 할 독자와 저자 간의 개인적인 능력, 성격, 자라온 환경 등의 차이가 있고, 저자가 처해있는 삶의 전제 상황이 그대로 독자에게 접목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간격이 존재한다. 우리의 삶의 문제들은 수학 공식이나 방정식 같은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 계발서는 쉽고 빠른 성공을 원하는 대중의 욕망에 적당히 부응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자신의 성공과 행복은 타인이 그 정답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에 두고 살아야 한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자신에게 어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는 …

새로운 환경이 지루함을 없애준다.

새로운 환경이 지루함을 없애준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가만히 자신을 삶을 연구 관찰해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인간은 늘 하던 대로 익숙한 상황에서는 생각하면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자동으로 행동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내가 수동기어가 장착된 자동차를 운전할 때를 생각해보면 운전이 익숙해지면 나의 머리가 1단, 2단 기어를 넣어야지 판단을 하고 기어를 넣는 것이 아니라 손이 자동으로 기어를 넣고 있고, 생각은 다른 생각을 빠져 있을 경우가 많이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방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지속해서 반복 될 때는 문까지 걸어가고, 문고리를 돌리고 하는 과정은 머리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손과 발이 움직인다. 이렇듯 우리의 생각은 익숙한 상황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습관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원리는 인간관계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적용 가능한 원리이다.사람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은 일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특이한 상황이다.그런 상황에서는 사람은 새로운 자극을 느낀다.생각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늘 해오았던 일상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그럴 경우 사람은 자극을 못 느껴서 지루함을 느낀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 속에서도 뻔한 멘트, 보통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거나, 자극을 주지 못하고 타인을 지루하게 만든다. 연인 사이의 만남에서도 지루하거나, 권태기가 왔다면 서로 간에 자극을 주는 대화 거리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도 평소의 삶이 권태롭거나, 나른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이 있다면 일상의 삶이 특별함이 결여된 상황들의 연속인 경우가 많이 있다. 일상적인 것에 함몰된 삶은 자극을 받을 거리가 없어서 늘 나른함, 지루함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이런 나른함을 떨치는 방법은 자신을 특별한 상황으로 던져서 자극을 느끼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나름의 대안을 생각해보면 자극을 주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과의 소통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바쁜 세상살이로 인해서 대부분의 사람은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질 여유가 거의 없어서 그런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없다면 책을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와 생각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책만 한 것이 있을까?

외롭다는 것은 별일 없다는 이야기이다

외롭다는 것은 별일 없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나이 30대에 중소기업 공장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다. 온종일 물건을 가지다 나르고 옮기는 일이었다. 온종일 육체적 노동을 하니 늘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저녁 7시에 마치면 겨우 저녁을 먹고 피곤해서 쓰러지기 일쑤였고, 일요일은 일주일간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고 종일 침대에 쓰러져 있는 시간으로 채워졌었다. 그때의 삶에서 느끼지는 감정은 고달픔, 힘겨움이었지 외로움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개인 사업을 하면서 자유로운 시간이 많이 생기면서 그제야 외로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외롭기 때문에 삶이 슬프고 힘들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조금 생각의 관점을 바꾸어 보면 힘들고 고달픈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외로움이 엄습하는 건 아닐까? 외로움은 현재 절박한 무언가가 없을 때 올라오는 부차적 감정이다. 오히려 외롭다는 것은 현실의 삶이 힘들고 고달픈 일이 없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는지. 100% 만족스러운 삶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100%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겠지만, 100% 만족스러운 삶을 목표로 두는 것과 100% 만족스럽지 못한 것을 불평의 원인으로 삼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맥락에 달라지면 가치판단도 달라진다

맥락에 달라지면 가치판단도 달라진다 사회생활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법, 도덕등이 있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사회규범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런 규범들은 모든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

극단적인 사고의 저변을 돌아보자

극단적인 사고의 저변을 돌아보자 인터넷을 돌아가니 다가 눈에 띈 어떤 대학교 영상 광고를 본 적이 있다. 광고카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입니다.”라는 카피가 들어 있는 영상이었다. 이 광고에 대해서 인터넷상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진 것을 본 적이 있다. 두 부류의 주장을 보면 한쪽은 광고 카피처럼 세상을 바꾸는 것은 따뜻한 가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쪽은  그렇지 않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지식이라고 주장한다. 각각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정답은 지식이 없으면 타인에게 해가 되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가 없어서 이해 없는 사랑으로 상대에게 폭력이 될 수가 있고, 따뜻한 가슴이 없는 냉정한 지식은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게 된다. 행복의 조건에 대한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한쪽은 사람이 행복을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 부닥쳐있든 세상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만족을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쪽에서는 그것은 노예근성에 길든 굴종이고, 정치, 사회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가져서 사람들이 생활하기 적합한 사회 환경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정답은 돈이 없어서 굶주리거나, 아파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현실에서는 정신적 만족함만으로는 버티기가 힘들다. 아무리 재산과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면 항상 …

사회문화를 제대로 분석하는 통찰이 필요하다

사회문화를 제대로 분석하는 통찰이 필요하다. 보편적인 사회적 가치 판단이 절대 불변의 진리처럼 인정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행동 기준으로 삼거나 타인의 행동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보편적 상식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것과 실제와는 서로 겉도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대표적인 것이 결혼이다. 결혼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가족을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라고 말한다. 그리고 결혼 적령기를 넘어서도 결혼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식의 곱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사회 저변에 퍼져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 사회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 명절날 고향에 가면 미혼 자녀의 결혼을 독촉하는 부모의 모습에서 적나라하게 느낄 수가 있다. 이런 결혼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판단을 내면화한 젊은이들은 스스로 사회적으로 뒤처진 존재가 되지 않으려는 듯 오로지 결혼 그 자체를 향해서만 달려간다. 마치 결혼만 하면 자신의 현재의 부족한 모든 것을 채워줄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결혼을 바라보는 듯하다. 결혼에 대한 긍정적 상식의 저변은 현실의 반영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우리 사회의 필요가 깔린 듯하다. 과거로부터 우리는 농경 사회였다. 농경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제일 중요한 생산수단은 노동력이었다. 과거에는 사교육 같은 육아에 필요한 비용은 거의 없었고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저비용 고효율의 인간 행위였다. 많은 노동력 확보를 위한 출산은 결혼에 대한 강한 사회적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이다. 그런 사회적 필요성은 결혼에 대한 긍정적 가치판단으로 스며들었다고 본다.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한다. 결혼하지 않으면 어른이 아니다. 결혼하지 않으면 뭔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 등으로 하지만 여기서 반문해보자. 실제 가족이 사랑의 공동체 인지 현실적인 경험을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운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통계적으로 이혼율이 3쌍 중 1쌍이 이혼을 한다. 이혼이라는 것은 부부갈등이 최고조로 달하였을 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2쌍은 결혼생활에 만족할까? 아동학대 가해자의 80%가 부모이고, 노인 학대 가해자의 70%가 자녀와 배우자라는 통계가 있다. 통계만 보더라도 결혼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과 현실은 많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오히려 결혼에 대한 지나친 긍정적 가치판단이 결혼 이후의 삶보다는 …

늘 죽음을 직면하는 자들의 유익함

늘 죽음을 직면하는 자들의 유익함 얼마 전 시내 도로를 운전하다가 내리막길에서 앞차의 급작스러운 정지로 인해 겨우 차를 세웠으나, 미쳐 브레이크를 밟지 못한 뒤차의 추돌로 인해 5중 추돌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내 차는 앞뒤로 많이 파손되어서 폐차하게 되었고, 사고당한  다른 차에 탑승하고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다. 나도 무릎 부분만 조금 부딪힌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 대개 이런 사고에 처할 경우 우리는 상당한 정신적 충격에 노출된다. 그리고 그런 충격은 비슷한 상황이 생길 경우 과거의 정신적 충격이 고스란히 되살아나서 정신력의 붕괴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것을 우리는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트라우마를 아주 적절히 표현해 주는 것 같다. 동일한 사고와 비슷한 정도의 물리적 충격을 받았음에도 몇몇은 정신적 공황 상태에 직면해서 구급차로 병원에 후송되었지만, 나는 거의 정신적 충격을 받지 않았다. 누구는 엄청난 충격에 시달리고, 누구는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는지 그 차이는 무엇일까  고민해보았다. 대부분의 공포와 두려움의 저변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그런 것들은 사고 등의 돌발적이고 급박한 상황에서 잠재적인 무의식의 공간에서 명확한 의식의 공간으로 떠올라 우리의 감정을 공포의 수렁으로 빠지게 만든다. 두려움은 생각해보지 않은 것, 직면해보지 않는 것 등을 맞닥뜨릴 때 자연 발생적으로 올라오는 감정이다. 하지만 나는 늘 죽음에 대해서 고민해왔고, 죽음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피해갈 수가 없는 숙명이란 점을 늘 명확한 의식의 영역에서 반추하면서 살아왔다.  그런 죽음에 대한 일상적인 직면이 충격적인 상황에서 공포감의 강도를 현저하게 약화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마저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무엇이 크게 두려울 수 있겠는가?  과거나 현재 상황들이 자주 자신에게 공포와 두려움 준다면 죽음에 대해 냉철한 직면을 해보고 그것이 의식의 공간에 머무른다면 공포의 강도는 현저히 떨어질 수가 있을 것이다. 인터넷상에 죽음에 대해서 검색해보면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시한부 환자가 마지막 순간 가장 후회하는 5가지 등을 어렵잖게 검색해서 읽어 볼 수가 있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해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만 쫓아 살다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서야 후회한다는 내용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그런 후회를 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평소에 마치 현생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면서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죽음에 대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음을 처절하게 고민해본 사람들은 현재의 삶은 유한하며, 남겨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 처절하게 고민하고, 그것에 온전히 자신의 힘을 집중하게 된다. 죽음의 순간 나는 나의 삶을 어떻게 평가 할 수 있을까?죽음의 순간 나는 무엇을 후회할까? 죽음의 순간에 생각의 초점을 맞추어본 사람에게 나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부질없는 것인지 명확해진다. 그리고 죽을 때 후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 후회할 일을 실천해 옮기고 있을 것이다. 사형수들을 많이 상담해본 어떤 스님의 말이 떠오른다…. 죽을때 보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자신의 감정대로 사는 것이 자신을 행복의 길로 이끈다

자신의 감정대로 사는 것이 자신을 행복의 길로 이끈다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물질만능주의와 경쟁적 사회구조로 인해 성공의 기준이 돈을 많이 벌거나, 치열한 경쟁에서 이긴 위치에 서는 것이 모두의 목표인 것처럼 주입받고 있다.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의 어린이나 청년들은 그런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서 경쟁 사회에서 승리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들을 자기 삶의 목표와 꿈으로 편입시키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은 자신 속에 가지고 있다. 그런 것들을 내 안에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이성적으로 계산해서 짜 맞추기도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라캉이라는 철학자는 ”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외부의 것들을 이성적 분석을 통해서가 하는 것이 아니다.내 안의 감정적 느낌으로 판단해야 한다.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계산해서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내 안의 울림을 확인하는 것으로 알 수가 있다.자신의 감정이 욕망하는 것, 자신이 충동적으로 하고 싶은 것이 자신이라는 존재가 원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면 내가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너무 좋고 기쁘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피아노 감상 또는 피아노 연주이다. 내가 수학 문제를 풀 때 너무 행복하고 제대로 풀었을 때 희열을 느낀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수학이다.그런데 피아노 치면 돈을 많이 벌고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으니깐 피아노를 친다거나, 수학을 잘하면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으니깐 한다면 그것은 외부적이고 이성적 판단에 기인한 것들이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할 때는 스트레스를 받는다.그러나 자신의 감정이 하고자 하는 것을 충족시킬 때 기쁨을 느낀다.기쁜 삶을 살아갈 때 행복한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감정에 충실히 반응하는 삶이다.그런데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다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그럴 경우에만 이성의 힘으로 절제를 하면 되는 것이다.어디 까지나 감정이 우선이고 이성이 부차적이다. 그동안의 우리 사회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명제에 충실하다 보니 이성적인 것이 가장 인간다움이라는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감정적 기쁨을 느끼는 일을  할 때 만족해하는 동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을 고민한다면 그것의 판단 기준은 이성이 아니라 나의 감정에 충실하게 반응해야 한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채우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채우는 것이다 사람을 살다 보면 자신을 힘들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하는 감정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후의 아픔,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순간, 타인으로부터의 무시당했을 때의 분노. 그런 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