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죽음을 직면하는 자들의 유익함

늘 죽음을 직면하는 자들의 유익함

얼마 전 시내 도로를 운전하다가 내리막길에서 앞차의 급작스러운 정지로 인해 겨우 차를 세웠으나, 미쳐 브레이크를 밟지 못한 뒤차의 추돌로 인해 5중 추돌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내 차는 앞뒤로 많이 파손되어서 폐차하게 되었고, 사고당한  다른 차에 탑승하고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다. 나도 무릎 부분만 조금 부딪힌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

대개 이런 사고에 처할 경우 우리는 상당한 정신적 충격에 노출된다. 그리고 그런 충격은 비슷한 상황이 생길 경우 과거의 정신적 충격이 고스란히 되살아나서 정신력의 붕괴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것을 우리는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트라우마를 아주 적절히 표현해 주는 것 같다. 동일한 사고와 비슷한 정도의 물리적 충격을 받았음에도 몇몇은 정신적 공황 상태에 직면해서 구급차로 병원에 후송되었지만, 나는 거의 정신적 충격을 받지 않았다. 누구는 엄청난 충격에 시달리고, 누구는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는지 그 차이는 무엇일까  고민해보았다.

대부분의 공포와 두려움의 저변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그런 것들은 사고 등의 돌발적이고 급박한 상황에서 잠재적인 무의식의 공간에서 명확한 의식의 공간으로 떠올라 우리의 감정을 공포의 수렁으로 빠지게 만든다. 두려움은 생각해보지 않은 것, 직면해보지 않는 것 등을 맞닥뜨릴 때 자연 발생적으로 올라오는 감정이다.

하지만 나는 늘 죽음에 대해서 고민해왔고, 죽음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피해갈 수가 없는 숙명이란 점을 늘 명확한 의식의 영역에서 반추하면서 살아왔다.  그런 죽음에 대한 일상적인 직면이 충격적인 상황에서 공포감의 강도를 현저하게 약화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마저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무엇이 크게 두려울 수 있겠는가?  과거나 현재 상황들이 자주 자신에게 공포와 두려움 준다면 죽음에 대해 냉철한 직면을 해보고 그것이 의식의 공간에 머무른다면 공포의 강도는 현저히 떨어질 수가 있을 것이다.

인터넷상에 죽음에 대해서 검색해보면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시한부 환자가 마지막 순간 가장 후회하는 5가지 등을 어렵잖게 검색해서 읽어 볼 수가 있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해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만 쫓아 살다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서야 후회한다는 내용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그런 후회를 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평소에 마치 현생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면서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죽음에 대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음을 처절하게 고민해본 사람들은 현재의 삶은 유한하며, 남겨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 처절하게 고민하고, 그것에 온전히 자신의 힘을 집중하게 된다.


죽음의 순간 나는 나의 삶을 어떻게 평가 할 수 있을까?
죽음의 순간 나는 무엇을 후회할까?

죽음의 순간에 생각의 초점을 맞추어본 사람에게 나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부질없는 것인지 명확해진다. 그리고 죽을 때 후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 후회할 일을 실천해 옮기고 있을 것이다. 사형수들을 많이 상담해본 어떤 스님의 말이 떠오른다…. 죽을때 보면 어떻게 살아왔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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