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왜 필요할까?

인문학은 왜 필요할까? 인문학 열풍이 뜨겁다. 그런데 인문학이란 이야기는 많이 회자 되고, 그 필요성 들은 강조되고 있지마는,인문학이 무엇인지. 왜 그런 인문학이 우리의 삶에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변은 누구도 해주지 않고 애매모호한 말들만 오고 가는 상황이다. 인문학이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간의 모습과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에 대해서 배우는 학문이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가 인문학의 대표 주자들이다. 인문학을 배움으로써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인간의 모습과 인간이 만들어낸 다양한 문화들을 간접경험을 통해서 알기 위함이다. 대개 개별적 개인은 행동반경은 고작 가족, 학교, 회사등에 국한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이해도 위의 행동반경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국한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다양한 인문학을 접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경험의 폭과 깊이를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인문적 경험의 이점이다. 인문학이란 인문 서적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음악뿐만 아니라 TV 드라마도 포함되어서 질 수가 있다. TV 드라마를 보면 나와 나의 주변 사람의 정서나 생각과는 아주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나는 이성 교제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지 살짝 들여다볼 수도 있고, 나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어떤 어려움이 처해 있는지 등도 알 수가 있다. 그런 인문적 경험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뛰어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사람은 대개 자기 생각, 자신의 감정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지레짐작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인문학을 통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할 수가 있고, 일방적으로 나의 방식이 아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방식으로 접근과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무지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이 선하다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타인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랑은 폭력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 원치 않는 폭력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꾸준히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삶의 모습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주체적 수용을 하여서 자신의 삶을 더 성숙하고 가치 있게 꾸며나갈 수도 있다….

어릴 때 상처는 현재를 잘 살 때 치유된다

어릴 때 상처는 현재를 잘 살 때 치유된다 인터넷상 고민 상담 사례를 들여다보면 많은 경우가 어릴 때의 가정 내에서 상처와 부모의 폭력으로 인해 성인이 된 후에도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어릴 때 부모나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성인이 된 후에도 낮은 자존감으로 힘들게 사는 경우도 많이 있고, 부모의 폭력으로 인해 트라우마로 공포감을 느끼면서 살아가거나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경우도 많이 있다. 한 사람의 미래는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살아온 환경이 열악하였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불행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삶이 불행했다고 하더라도 현재에는 행복하게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 나는 현재의 …

말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소통이 안 된다

말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소통이 안 된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의미를 전혀 다른 의미로 곡해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대부분이 한쪽에서는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런 맥락을 무시한 채 단순히 문자적인 해석으로 말을 의미를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경우 말하는 사람입장에서는 말꼬리 잡기라고 생각될 수가 있다. 우리의 언어는 똑같은 말이라도 하여도 어떤 상황에서 말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하게 사용되어서 질 수가 있다.그런 상황을 무시하면 동일한 말을 하더라도 전혀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어 진다. 예를 들어보자몸이 어떠십니까? 라는 말의 경우1) 병원에서 의사가 말하는 의미는 ‘몸의 병세 변화를 묻는 것이고2) 어르신네에게 젊은 사람이 하는 말의 뜻은 ‘ 일반적으로 안녕하시냐의 안부3)길 가다 서로 부딪혀서 묻는 말은 ‘ 어디 다치지 않았느냐의 질문4) 다이어트 하는 사람에게 묻는 의미는 ‘ 체중 변화 여부를 묻는 내용5) 운동하지 않던 사람이 심한 운동이나 등산을 한 경우, ‘ 컨디션은 괜찮으냐.’의 질문 등 위의 몸이 어떠십니까? 란 말의 의미는 전제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무슨 뜻인지 정해진 것이 없다.어떤 상황인지 그 전제 상황을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우리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에 한 가지 의미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변화무쌍하다. 가령 GET이라는 단어의 뜻을 사전에 찾아보면 받다, 얻다, 받다, 오다, 수신하다 등 의미를 27가지로 해석이 …

인정욕구가 지나치면 인간관계의 단절을 가져온다

인정욕구가 지나치면 인간관계의 단절을 가져온다 꼰대라는 말이 있다. 굳이 의미를 정의해보자면 고리타분하고 어른인 척 잔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을 말한다. 좀처럼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주장만이 옳다고 우기는 인간 유형이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중에서도 자기 생각, 자신의 신념, 자신의 가치를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을 때 느낄 수 있는 쾌감은 꽤 중독성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타인과의 소통에서 자기 생각의 오류를 점검하고 수정하려는 의사는 없다. 단지 자신의 기존의 신념을 상대에게 주입하거나, 인정받으려는 목적만 있을 뿐이다. 새로운 신념을 수용한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의 혼란함과 자존심의 손상이라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꼰대는 그런 수고로움을 기피하고 오로지 타인의 인정을 통한 감정적 쾌감에만 몰입하려고 한다. 나도 한때는 얄팍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무조건 우기는 것에 익숙한 적이 있었다. 남과의 소통에서 지지 않는 것이 나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기존의 나의 신념을 확인하는 쾌감보다는 새로운 깨달음의 쾌감이 훨씬 더 유익하고 달콤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처음부터 바른 판단을 하는 사람은 없다. 서투른 판단들은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서 조금씩 다듬어지는 것이다. 그런 다듬어지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사람은 발전이 없는 사람이 되고, 독선과 아집은 타인에게 신뢰를 주지 못해서 늘 인간관계의 갈등의 원인이 되고 결국에는 사회생활 속에서 늘 외톨이로만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끊임없는 나아지려는 노력은 생각을 보편적 가치와 합리성을 확보하게 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신뢰를 주게 되고, 많은 친구도 생기는 계기가 된다. 사회생활을 잘하고 인간관계를 잘 형성한다는 것은 별다른 게 아니다. 타인에게 신뢰를 줄 만한 생각을 하고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서 대개 좌우된다. 성숙한 사람은 만들어져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을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세월만 흐른다고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왕따의 내적원리

우리나라에서 ‘왕따’ ‘집단 따돌림’ ‘집단 괴롭힘’ 등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사회문제가 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최근에 와서는 국내에서도 집단 따돌림 현상은 청소년들 사이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으며 피해 당사자의 자살, 가해 학생의 구속, 피해 학생의 부모가 학교와 교육청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 사회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 왕따 문제를 분석해보면 왕따의 대상은 대부분이 상대적 약자들이다. 약자를 향한 왕따는 상대의 보복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키가 작고 몸집이 왜소한 데다 한국 혼혈이라는 이유로 왕따를 엄청나게 당했다는 연예인의 고백을 본 적이 있다. 왕따의 대상이 힘세고 강한 아이들이 되는 경우는 없다. 힘없는 아이들을 왕따 시킴으로써 나는 힘 있는 아이로 자리매김 할 수 있다. 스스로가 권력자의 위치로 올라설 수가 있는 자기 우월감을 만족하게 할 수 있다. 왕따 참여하는 모두는 같은 공동의 적을 둔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따 시키는 데 동참함으로써 자신은 왕따 될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 보험을 들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 강한 아이에게 당했던 억울함과 분노를 고스란히 약한 아이에게 표출할 수가 있어서 대리 복수의 효과도 있다. 그런데 과연 아이들의 세계에만 왕따의 메커니즘이 적용될까?인터넷 커뮤니티의 발달로 왜곡된 병리적 현상들이 더욱더 확대 재생산되는 것 같다. 사회적 소수인 외국인에 대한 근거 없는 차별과 악마화, 장애인에 대한 비하 등의 문제에도 고스란히 왕따 메커니즘은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 이렇게 확연히 드러나는 경우뿐만 아니라 평범한 보통 사람의 회사생활이나 친목모임속에서도 은근히 왕따 메커니즘은 적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자신의 존재 활동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군림을 통해서 찾으려는 왜곡된 심리 상태를 냉철히 바라보지 못한다면 사회적 왕따 현상은 지속할 것이다.

창의성을 키우는 방법은 자유롭게 키우는 것이다

창의성을 키우는 방법은 자유롭게 키우는 것이다- 요즘의 아이들 교육의 중심에서 늘 창의성이 있다. 그리고 창의성이 길러 주기 위해서는 어떤 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창의성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그런 것들을 아이들에게 주입하고 훈련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창의성은 아이들의 자발적 관심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의성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아이들의 자발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타율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을 못 견뎌서 하는 습성이 있다. 잠깐의 시간은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뭔가를 해야만 지루함을 벗어날 수가 있다. 누군가가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뭔가를 시도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즉 가만히 내버려 두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시도하는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지시하지 말고 내버려 두고 관찰해보면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 어떤 아이는 스스로 그림을 그릴 것이고, 어떤 아이는 놀이터에서 모래 놀이를 할 것이고, 어떤 아이는 장난감으로 놀이를 할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자기 주도적으로 놀이를 할 것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기존의 방식이 지루해질 즈음 다른 방식의 놀이를 스스로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런 새로운 시도가 창의성이고, 그런 새로운 시도의 성공이 창의성의 결과물이다. 당장의 놀이에 대한 창의성의 발현일지 모르나, 그런 새로운 시도와 그런 것의 성공 경험은 성장한 후의 자신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적용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창의성을 길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가 개입하지 않고 아이 …

도덕은 의심의 대상이다

옛날 역사를 들여다보면 가장 큰 죄는 반역죄이다. 그 죗값은 관련된 자들은 죽임을 당한다. 그냥 죽임을 당하는 게 차원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게 만들면서 서서히 죽게 만든다. 그리고 전혀 관련 없는 삼족까지도 연좌제라는 족쇄 때문에 멸족한다. 반역죄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기존 기득권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일 뿐이다. 전통적인 기득권유지의 방법은 반역죄처럼 하지 말라는 식의 죄를 정해놓고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억압적 형태이었다. 옛날까지 갈 필요 없이 몇십 년 전 독재정권에서도 정권에 대한 반대에 대해서는 감금, 폭행, 고문을 자행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기득권층의 자신의 권력 유지의 방법들은 교묘하게 진화 시켜 왔다. 그중에서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 모두가 지켜야 할 도덕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그중에 하나가 “겸손”이라는 도덕의 의미 왜곡이다. 현재 사회적으로 겸손이 사용되는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어떤 공동체에서 이러쿵저러쿵 개인이 말을 많이 하거나, 조직 지도자의 결정에 반대를 하는 경우를 겸손하지 못하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지도자의 말에 복종하고 지시에 잘 따르는 사람들을 겸손하다고 이야기한다. 겸손의 본래 의미는 자기 생각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지 않고, 항상 자기 생각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바른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 상태이다. 오히려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획일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겸손하지 못하다고 죄악시하는 건 기득권층의 교묘한 술수가 개입된 것이다. 기존의 금지규정을 통한 권력 유지는 개인의 반발에 대한 힘으로 억압을 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다. 하지만 도덕의 의미 왜곡을 통하는 방법은 공동체의 평안을 위한 명분으로 인해 구성원의 자발적 복종을 하게 한다. 그리고 공동체 내에서 각 개인끼리 서로 간에 겸손하기를 은연중에 강요하게끔 만든다. 즉 기득권층으로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고, 부작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기득권유지 전략이 되는 셈이다. 기존 질서와 도덕은 전부 다 진리일 수는 없다. 공동체 구성원의 명시적 합의를 거쳤다고 반드시 진리가 되고 무조건적인 복종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세월이 …

지식과 지혜가 무엇이 다른가?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 책을 통한 지식의 소중함과 유익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이는 진짜 중요한 건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는 반론을 제기하곤 한다. 지식과 지혜는 전혀 무관계한 영역이라는 전제를 두고 있는 듯해서 씁쓸함을 느끼곤 했다. 여기서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에 대해서 알아보자. 2015년 6월 15일  대한민국은 메르스라는 신종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치사율이 거의 20%에 육박했다. 그렇다면 메르스가 창궐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국민 개개인은 메르스에 전염되지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즉 메르스를 대처하는 지혜라고 질문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다. 메르스의 전염경로는 기침할 때 퍼지는 침이나 가래에 섞인 병원균이 호흡기를 통해서 감염되는 ‘비말감염’으로 전염된다고 알려졌다. 생활 수칙은1. 외출 시 마스크를 착용하기.2. 외출하고 돌아오면 손 씻기.3. 감염자와 접촉하거나 근접하여 대화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위의 경우 전염경로 부분은 메르스라는 전염병의 지식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생활 수칙 부분은 메르스를 대하는 각자의 지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식과 지혜의 사전적 의미는지식이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이다.지혜란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다. 즉 지식은 어떤 대상의 본질이나 사실을 아는 것을 말하고 지혜는 그런 지식을 구체적인 자신의 삶에서 활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에서 정확한 메르스의 전염경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습득해야지 생활수칙 같은 자신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 가능 지혜가 나올 수가 있다. 사회생활에서 제일 힘든 것이 인간관계라고 말한다. 인간관계를 지혜롭게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먼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아는 것이 먼저이다. 그것들을 이해하고 있어야지만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대해야지 서로 간의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지? 어떻게 하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지혜롭게 대처가 가능할 수가 있다. 지혜와 지식을 별개의 독립된 영역이 아니다. 두 가지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확한 지식이 전제되지 않은 지혜로움이란 성립할 수가 없다. 그리고 자신의 머릿속 생각만으로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과의 소통과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적은 책을 읽어야 한다. 결론은 지혜로운 생활을 위해서 지식의 습득은 필수라는 것이다.

착한아이는 바람직한 아이가 아니다-

부모들의 자식 자랑에서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기 있다. “우리 아이는 부모들 말을 잘 듣는다.”는 이야기이다. 이 말은 부모들이 살아온 사회 환경이 그대로 투영된 말이다. 과거에는 경제적으로 동일제품, 대량생산시대여서 그런 경제적 여건은 말 잘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생존에 훨씬 유리했다. 가치관도 인간의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형성되었다고 본다.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이 강조되던 시기였고, 효율성이라는 맥락 속에서 모든 가치판단이 형성되던 시대이었다. 창의적인 사람보다는 복종하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더 필요로 하던 시대였다. 부모의 경험으로는 그나마 입 다물고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해야만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경험이 자식들에게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행복과 현재의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런 아이들의 상태는 부모들의 편안함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겠지만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먼저 아이들이 부모 시키는 대로만 살아간다면 독립적인 개체로 발전할 수가 없다. 20세 이후 성인이 된 아이들은 자신의 모든 삶은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다. 자기 주도적 삶의 경험이 전혀 없는 아이들이 나이만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과연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가 있을지 의문이다. 미성년의 시기는 성인이 된 후에 스스로 독립해서 살아가야 할 경험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현재는 기존의 것을 따라 배우기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것들을 창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런 창의성이 부모가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고 해서 과연 길러질지가 의문이다. 창의성이란 자기 스스로가 주도해서 생각하고 행동할 때 발현되는 것이다. 그런 자기 주도성은 성인이 된다고 해서 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연습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욕망과 자식의 욕망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은 자식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부모의 욕망에 맞춘다는 말이다.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아이의 내면은 건강할 수가 없다. 그런 삶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뒤틀어진 욕망으로 표현된다. 분노 짜증 등으로 결국은 뒤틀어진 욕망의 끝은 일탈로 이어져서 청소년 문제로 연결된다.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순종과 주입보다는 설득하고 이해를 시키고 아이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가능하면 아이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아이들은 대화의 대상이지 강요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