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인 사고의 저변을 돌아보자

극단적인 사고의 저변을 돌아보자

인터넷을 돌아가니 다가 눈에 띈 어떤 대학교 영상 광고를 본 적이 있다. 광고카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입니다.”라는 카피가 들어 있는 영상이었다. 이 광고에 대해서 인터넷상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진 것을 본 적이 있다. 두 부류의 주장을 보면 한쪽은 광고 카피처럼 세상을 바꾸는 것은 따뜻한 가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쪽은  그렇지 않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지식이라고 주장한다. 각각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정답은 지식이 없으면 타인에게 해가 되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가 없어서 이해 없는 사랑으로 상대에게 폭력이 될 수가 있고, 따뜻한 가슴이 없는 냉정한 지식은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게 된다.

행복의 조건에 대한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한쪽은 사람이 행복을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 부닥쳐있든 세상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만족을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쪽에서는 그것은 노예근성에 길든 굴종이고, 정치, 사회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가져서 사람들이 생활하기 적합한 사회 환경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정답은 돈이 없어서 굶주리거나, 아파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현실에서는 정신적 만족함만으로는 버티기가 힘들다. 아무리 재산과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면 항상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불안한 삶을 살 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관적 만족과 객관적 환경 두 가지가 모두 전제되어야지 인간은 행복해질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예들은 각각 나름대로 일면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지마는 어느 한 가지만 충족되어서는 해결될 수가 없는 문제이고, 두 가지 모두 충족되어야만 이루어질 수가 있는 문제이다. 즉 문제의 정답이 여러 개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극단적인 사고로 다른 의견을 묵살하고 한 가지 주장만 옳다고 강하게 주장을 할까? 나의 진단으로는 우리나라 교육의 시험 시스템의 문제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초등, 중등, 고등학교 시험을 생각해보면 4지 선다형이든 아니면 주관식 문제이든 늘 한 가지 해답만을 요구해왔다. 기껏해야 문제 출제의 오류로 어쩔 수 없이 한 개 이상의 정답을 인정해주는 경우도 있는데 극히 드물다.


이런 시험제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답은 늘 한 가지만 존재해야 한다고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삶의 대부분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한 가지만 있는 경우는 거의 존재 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문제의 해답은 한가지인 경우도 있고, 여러 개인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결국 극단적인 사고의 저변에는 잘못된 교육제도가 우리의 의식을 왜곡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서로 소통하다가 극단적으로 서로의 의견이 충돌을 일으킨다면, 감정적 분노보다는 문제의 해답은 한가지여야만 한다는 의식에 길들여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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