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아이는 바람직한 아이가 아니다-

부모들의 자식 자랑에서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기 있다. “우리 아이는 부모들 말을 잘 듣는다.”는 이야기이다. 이 말은 부모들이 살아온 사회 환경이 그대로 투영된 말이다. 과거에는 경제적으로 동일제품, 대량생산시대여서 그런 경제적 여건은 말 잘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생존에 훨씬 유리했다. 가치관도 인간의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형성되었다고 본다.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이 강조되던 시기였고, 효율성이라는 맥락 속에서 모든 가치판단이 형성되던 시대이었다. 창의적인 사람보다는 복종하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더 필요로 하던 시대였다. 부모의 경험으로는 그나마 입 다물고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해야만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경험이 자식들에게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행복과 현재의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런 아이들의 상태는 부모들의 편안함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겠지만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먼저 아이들이 부모 시키는 대로만 살아간다면 독립적인 개체로 발전할 수가 없다. 20세 이후 성인이 된 아이들은 자신의 모든 삶은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다. 자기 주도적 삶의 경험이 전혀 없는 아이들이 나이만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과연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가 있을지 의문이다. 미성년의 시기는 성인이 된 후에 스스로 독립해서 살아가야 할 경험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현재는 기존의 것을 따라 배우기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것들을 창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런 창의성이 부모가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고 해서 과연 길러질지가 의문이다. 창의성이란 자기 스스로가 주도해서 생각하고 행동할 때 발현되는 것이다. 그런 자기 주도성은 성인이 된다고 해서 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연습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욕망과 자식의 욕망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은 자식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부모의 욕망에 맞춘다는 말이다.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아이의 내면은 건강할 수가 없다. 그런 삶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뒤틀어진 욕망으로 표현된다. 분노 짜증 등으로 결국은 뒤틀어진 욕망의 끝은 일탈로 이어져서 청소년 문제로 연결된다.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순종과 주입보다는 설득하고 이해를 시키고 아이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가능하면 아이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아이들은 대화의 대상이지 강요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