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획일적인 본질은 없다

과거 철학사를  쭉 살펴보면 플라톤 이래로 일관된 관점이 있다. 존재에 대한 관점이 획일적인 기준이나 본질이 있다고 간주하던 시간이 2000년 가까이 되었다. 그런 관점은 한 가지 정해진 기준으로 사람을  재단하였고, 인간의 삶을 특정한 대상을 닮아가기 위한 과정 즈음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본질이나 일관된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날이 변해가는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존재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즉 존재의 획일화된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모습 그 자체를 인정한다.

 

이런 철학의 관점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해 볼지를 고민해 보자.

 

첫째. 사람마다 다른 개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런 개성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획일화되고, 이상적인 기준을 상정해두고 그런 것을 닮기를 강요하는 문화였다. 그런 강요에 반하는 존재는 배제의 대상이었으며, 폭력을 통한 교정의 대상이었다. 과거 내가 중, 고등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머리를 빡빡 밀어야 했으며, 정해진 교복을 입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물론 우리 사회에는 여러 부분에서 이런 문화가 상존하고 있다. 자유로운 개성의 발현은 창조성의 밑거름이 된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서구 선진국에 비해서 뒤떨어지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의 말이 다시금 되새겨진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둘째. 사람은 나날이 변해가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과거에 얽매여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과거에 화려했던 젊음이나 건강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현재의 모습에 자괴감에 빠지는 수가 있다. 자신의 모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지금 이 순간이다. 젊을 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이 있고, 노년에는 노년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획일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셋째. 현대 철학의 존재에 대한 관점은 자신의 미래의 삶은 자신이 만들어 갈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미래의 자신의 모습은 오늘과는 다른 미래의 시점에서 정해진다는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깨닫는 것과 과거의 잘못을 현재로 끌고 와서 자괴감에 빠지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과거의 잘못을 고치고 성숙해진다면 과거의 모습과는 다른 성숙함이 자신의 존재의 모습이 된다. 과거와 현재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미래는 내가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 나의 존재의 양상은 자신이 창조해 갈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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